다시 소환한 어제의 오늘-1955년 7월 22일

남성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수많은 여성을 유혹했지만, 법은 남성의 편에 섰다. 바로 희대의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이다.

1955722일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인수의 혼인을 빙자한 간음 1심 선고가 있었다.

재판부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며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박인수는 동국대학교 사학과에 다니다가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학을 중퇴하고 해병대 헌병 부사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해병대 헌병중사로 전역했고, 19544월부터 주로 해군 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에서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하며 19556월까지 불과 1년 여 사이에 여대생을 비롯한 70여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

호리호리하고 훤칠한 미남자였던 박인수는 헌병 시절 배운 사교춤으로 여성들을 유혹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기소 내용에 대해 박인수는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자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많은 여자들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미용사였던 여자 한명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해 순결의 확률이 70분의 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1심 재판에서 박인수는 역사에 길이 남을(?) 판결을 통해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 공무원을 사칭한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받았다. 이 판결을 놓고 여성인권 경시하는 비판과 함께 현대적인 개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첫 판결이라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후 박인수의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징역 1년형이 확정됐다.

1심과 2심에서 여성의 정조 문제가 사건의 핵심처럼 다뤄지다 보니 박인수의 범죄행위는 뒤로 밀리고,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한 피해 여성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재판에서 진술하는 박인수 모습을 실은 당시 신문(출처-네이버 블로그)
재판에서 진술하는 박인수 모습을 실은 당시 신문(출처-네이버 블로그)

지난 해 1,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박인수 사건을 다루면서 197310대 남성의 동급생 여성 성폭행 사건을 조명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남성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2심 판사는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을 지어주자..”는 취지의 발언으로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줬다.

이 두 사건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경미하게 다뤄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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