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걸작-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출처-나무위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출처-나무위키)

주세페 베르디(1813-1901)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황금기를 이끌었던 작곡가다. 23세 때인 1836, 아버지의 친구로 베르디를 음악적으로 후원하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아들과 딸을 연이어 잃고 오페라 작곡가로 막 발돋음하던 1840년에는 아내마저 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베르디는 결혼 4년 만에 가족을 모두 잃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짜 스타니슬라오(또는 하루만의 임금님)’가 초연에 실패하면서 베르디는 자살까지 결심하는 절망에 빠졌다.

베르디는 1842나부코가 큰 성공을 거두며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데, 여기에는 한 여인의 도움이 컸다. 베르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였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1815-1897)였다.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이자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주세피나(출처-국립오페라단 블로그)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이자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주세피나(출처-국립오페라단 블로그)

주세피나는 1830년대 이탈리아 최고의 소프라노였다. 로시니의 도둑까치라 체네렌톨라’, 벨리니의 청교도노르마’, 도니체티의 마리노 팔리에로람메무어의 루치아’, ‘루덴츠의 마리아등 당대 인기 작곡가들의 오페라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무대를 장악했다.

그 무렵 베르디는 첫 두 오페라가 실패하면서 작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라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와 동거를 하고 있던 주세피나는 베르디의 재능을 알아보고 메렐리에게 그를 추천해서 극장과 계약을 맺도록 도와주었다.

이를 계기로 베르디는나부코를 작곡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억류되어 포로생활을 했던 구약성경의 바빌론 유수를 모티브로 하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맞물려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고양에도 크게 기여했다.

1842나부코가 초연됐을 때 주세피나는 나부코의 양녀이자 바빌론의 전사인 아비게일레 역을 맡았다. 주세피나는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고, 결국 자살하고 마는 극적인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했고, 그의 열연에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 해에도 주세피나는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에서 아비가일레를 연기한 덕분에 나부코는 점점 더 인기를 얻게 됐다.

'나부코'에 나오는‘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에서 제2의 국가라고도 불린다.(출처-네이버 블로그)
'나부코'에 나오는‘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에서 제2의 국가라고도 불린다.(출처-네이버 블로그)

그러나 이후 베르디와 주세피나의 운명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베르디는 작곡가로 자리잡으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반면 주세피나는 출산 후유증과 무리한 출연 등으로 건강을 잃게 되면서 1846년 은퇴를 하게 된다.

파리에서 성악레슨을 하며 살던 주세피나는 1847년 자신을 찾아온 베르디와 재회하게 된다. 그동안 두 사람은 꾸준히 편지를 교환해왔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파리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은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주지 않았다. 주세피나는 앞서 테너가수, 극장 지배인과 동거하면서 그들의 사생아를 낳은 미혼모였고, 작곡가 도니제티와도 염문이 있었다. 이런 복잡한 남자관계는 당시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행위였다.

두 사람은 11년 간 내연관계로 지내다가 1859년에야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주세피나는 결혼을 원했지만 베르디가 결심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부부는 38년을 함께 했다. 동거기간까지 합치면 49년이었다.

주세피나는 1897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베르디가 51년 전에 자신에게 처음으로 보낸 편지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4년 후인 1901년 베르디도 영면에 들었다.

베르디의 장례식에 모인 군중들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의 지휘에 맞춰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가라, 내 마음이여’(Va, pensiero)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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