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다반사多反辭] 인생을 되돌아보니 할 말이 많네

코너를 시작하며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 안나고, 떠오르는 장면도 없지만, 대사 한마디 건져서 잘 써먹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경험만한 진실은 없다..”가 바로 그 대사입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단어 하나만 치면 수백, 수천개의 기사가 뜨고, 퍼오기, 좋아요, 공감.. 등의 공유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고, 그러면서 때론 왜곡되고, 조작되면서 진실은 사라지곤 합니다. 그에 대한 경계심으로 이런 말들을 하곤 하죠. “직접 봤어?”, “진짜야?”
어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슈, 뉴스 이런 게 아니라 진짜 목소리, 진짜 마음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웨딩TV뉴스에서는 우리 사회 원로들에게서 듣는 인생 이야기를 마련합니다. 삶과 인간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읽으며 잠깐 생각에 빠져보시겠어요?  -편집자

 

불꽃처럼 살다 간 여인 Evita를 기억하시나요?

 

그녀에 관한 노래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It won’t be easy, you’ll think it strange

When I try to explain how I feel

That I still need your love after all that I have done

………………………..

…………………………

Don’t cry for me Argentina !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All through my wild days

……………………….

………………………..

Don’t cry for me Argentina !

 

누구나 알고 있는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노래죠? 이 노래의 주인공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Maria Eva Duarte)를 아시나요? 그녀는 1919년 5월 7일 출생하여 1952년 7월 26일 사망한 인생을 불꽃처럼 태우고 간 남미 아르헨티나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드 페론(Maria Eva Duarte de Peron) 또는 이름만으로 에비타(Evita)로 불리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프랑스 바스크인 이민자 후안 두아르테(Juan Duarte)였고, 어머니는 스페인 바스크인 이민자 후아나 이바르구엔(Juana Ibarguren)이었습니다(바스크인은 프랑스 서부와 스페인 북서부에 사는 민족).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시골 로스 똘도스(Los Toldos)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15세에 수도 부에노르 아이레스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녀는 1946-1952년에 후안 페론(Juan Peron) 대통령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1945년의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그녀 나이 26세 때이다.(출처-en.wikiepdia.org)
1945년의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그녀 나이 26세 때이다.(출처-en.wikiepdia.org)

그녀는 33세의 나이에  인생을 불꽃처럼 태우고 사망했으며, 지금은 La Recoleta 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생전에 아르헨티나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했고, 여성 페로니스트당을 이끌었으며, 에바페론 재단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이미 부인과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며, 에비타는가족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로 인해서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어릴 때 어머니는 삵바느질을 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했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바로 쫒겨났습니다. 에비타는 아버지의 사후에는 식당 등을 전전하며 살기가 많이 힘들었으며, 어머니는 에비타를 굶지않고  살게 하기 위해서  일찍 시집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15세가 되던 해에 에비타는 젊은 음악을 하는 허황한 바람둥이 남자 아구스틴 메갈디(Agustin Magaldi) 를 만나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출을 합니다. 당시 그곳은 남미의 파리(Paris of the South America) 로 불리는 환락과 풍요의 도시였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에비타는 멜로드라마나 2-3류 모델로 일하거나, 아니면 라디오(Radio Belgrano)에 출연하면서 가난한 생계를 겨우 겨우 이어갑니다.  에비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가 조그만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남자들의 일시적 애인이 되는 일을 했습니다.

1944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큰 지진이 있어서  나라에 큰 재앙을 가져옵니다. 24살의 에비타와  48살의 후안 페론 대령은 지진 피난민을 돕기 위한 바자회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어 동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후안 페론은 그의 국민적 인기로 인해서 체포되었다가 1945년 10월 9일 석방됩니다. 그리고 1946년에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되고, 로스 똘도스의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란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가 됩니다. 

1952 년 선거에서 에비타는 열열한 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통령 후보가 되었으며, 그녀의 인기는 남편인 페론을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에비타에게 큰 불행이 찾아듭니다.

에비타는 병원에 입원하여 맹장수술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자궁경부암을 선고받게 됩니다. 몇개월 후에 에비타는 자궁제거수술을 받았고, 그 와중에 남편 페론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에비타는 국가의 영적지도자(Spiritual leader of the Nation)로추대됩니다.

그러나 암은 전이되고 재발하여 결국  1952년 7월 26일 36kg 의 허약하고 조그만 병자로 변한 에비타는 수많은 아르헨티나의 서민들을 뒤로 한채 가난했던 시절과 화려했던 시절을 꿈으로 간직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아르헨티나 빈민굴의 가난한 집안에서 서출로 태어난 에비타는 살기 위해서 온갖 잡일을 하였으나,  장차  대통령에  당선될 인물을 만나서 결혼하고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대통령 영부인인 되었으며, 가난한 자를 위한 수많은 일을 하고 불꽃처럼 사라졌습니다.

그 일생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불굴의 의지, 아니면 '고진감래' 라고 할까요?

 

그에 관한 노래는 다음과 같이 끝나지만, 그녀가 남긴 발자취는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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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cry for me Argentina !

Have I said too much?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But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d is true

 

이상수 박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기자로 오래 활동했으며, 미국에서 해양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시애틀에서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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