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편견과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독신 여성들
결혼을 늦게 하거나 하지 않고, 출산 연령이 높아지는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특히 여성들은 더 그렇다. 독신 여성이 증가하면서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하는 개념과 인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체성을 고민하고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작가이자 언론인 엠마 존(Emma John)은 과거 노처녀(spinster)라고 불리던 자신과 같은 독신 여성들을 어떻게 불러야할지 자문하면서 독신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증가하는 시대적 현상을 직시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는 칼럼을 영국 가디언에 게재했다.
자신의 선택도 아니고, 극적인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게 독신이 됐다는 엠마 존은 여동생의 임신 소식을 듣고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유령 같은 단어인 ‘노처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요즘 이 단어가 잘 쓰이지 않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먼저 여성혐오자들이 희망 없다고 중얼거리는 또는 건조하다고 욕하는 의미의 단어이고, 아내가 되는 것이 더 이상 의무사항도, 최종적인 것도 아닌 시대이며, ‘시민동반자법(Civil Partnership Act)’시행으로 2005년 정부가 결혼신고서에서 이 단어가 사라짐으로써 더 이상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말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다른 더 좋은 단어로 대체된 것도 아니다. 그러면 과거에 ‘노처녀’라고 불리던 우리 같은 여성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자유여성?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측면이 있다. 평생 독신(Lefelong singles)? 냉장고 구석에서 영원히 보관될 수 있는 치즈 같은 느낌이다.
우리 같은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 <국립통계국>에 따르면 결혼한 적 없이 커플을 이루지 않고 살고 있는 여성의 수가 70세 이하의 모든 연령대에서 증가하고 있다. 2002년~2018년 기간에 40세~70세 구간의 그런 여성들이 50만명이 늘었고, 40대 중에서 결혼한 적 없는 여성의 비율은 같은 기간 두배가 됐다.
이는 서구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올드미스’는 부유한 독신을 의미하는 ‘골드 미스’가 됐다. 일본에서는 25세 이상의 미혼여성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라고 불린다. 유효기간을 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출신의 쇼쉬 슐람(Shosh Shlam) 감독의 2019년 다큐멘터리 ‘중국의 슝누(sheng nu는 20대 이상의 미혼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에서는 소위 ‘찌꺼기 여성들(Leftover Women)’이라고 불리는 미혼 여성들과 이들이 일으키는 전통적인 결혼형태의 붕괴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탐구하고 있다.
독신은 더 이상 조롱거리가 아니다. 결혼하지 않거나 장기적인 파트너를 사귀지 않는 것은 하나의 유효한 선택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부러움과 씁쓸함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노처녀의 삶을 살고 있다. 여성운동가인 엄마 밑에서 자라 많은 친구들과 안정된 직장을 누리는 내가 왜 ‘노처녀’라는 말에 낙인을 실감하는가? 중년이 되도록 아직 성인여성이 안됐는가?
나의 상황은 일시적인 일탈이며, 비상한 또는 적극적인 반응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의 일상은 스케쥴이 꽉 차있었고, 일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났다. 자연히 나의 짝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동생은 임신을 했고, 나는 독신이며 또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상황은 나에게 불리해지고 있다. 테러리스트에 의해 죽을 확률이 40세 이후에 남편을 만날 확률보다 크다는 것이 최근의 통계에 의해 틀리다고 결론 났다.
영국에서 이성과의 평균 결혼연령이 여성 31.5세, 남성 33.4세로 늦어졌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35세~47세 그룹에서 독신이 가장 많으며, 심지어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보다 많다.
노처녀의 삶이 주는 가장 잔인한 것 중의 하나는 마치 열외자나 괴물처럼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통계상 나의 상황이 매우 특이하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친한 친구들 중 10여명은 30대 후반~40대 초반이며,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결혼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 맞는 연령대의 남성들이 거의 없으니 사랑의 기회가 감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온라인 데이트에 지쳐있다. 틴더(Tinder)와 범블(Bumble)도 지겹다. 나는 이하모니(eHarmony)에서 나에게 맞는 상대를 찾을 수 없다고 탈퇴당했다.
20대 때, 나와 친구들은 농담과 관심 있는 남성들에 대한 얘기로 얘기꽃을 피웠다. 지금은 그런 주제는 피한다. 내게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다.
내 친구 알렉스(Alex)는 “또 다른 반쪽이 있나요(And do you have another half?)”라는 질문에 대해 상황에 따라 일련의 대답을 갖고 있다. 가장 강력한 대답은 “아니오, 저는 온전한 사람입니다(No, I’m a whole person)”이다.
노처녀가 되면 격리될 수 있다. 자신만큼 절망적인 경우는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지속적으로 사람과의 접촉이 없고,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중요한 질문을 자문하게 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감정을 놓치고 있나? 이기적이고 외롭고 하찮게 될까? 파트너와 밀접한 관계없는 생활이 절반의 사랑, 절반의 인생일까?
현재의 여성운동 체계 내에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거나 질문 자체가 제기돼서는 안된다. <커플이라는 규범의 집요성(Tenacity of The Couple-Norm)>의 저자 사샤 로즈네일(Sasha Roseneil) 교수는 “사람들은 갈등하고 있다. 모순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편으로 독신은 괜찮고 훌륭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문제가 있는가? 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누리는 많은 특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싶지 않으며, 나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독신여성들은 자신들이 투덜대는 사람으로 또는 절실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노처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려 애쓴다.
서구사회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을 다루는 문제와 씨름해 왔다. 중세의 광신적 종교집단의 소위 마녀사냥을 보라. 공동체는 독신여성들 생활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독신여성들을 보살펴줄 수 없는 집단적 죄의식 때문에 그들에게 집착했다.
독신여성들이 마녀가 아니었을 때는 종종 창녀로 여겨졌다. 적어도 마녀라는 단어와 창녀라는 단어가 비슷한 의미로 여겨지는 한에 있어서.
노처녀를 의미하는 스핀스터(spinster)라는 단어는 원래 상인계층의 일부였으며 경멸할 정도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용어는 1300년대 중반 하급계층의 독신여성들이 얻을 수 있는 직업중의 하나인 저임금의 실을 짓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말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생활했으며 가족 내에서 자신들의 재정적 역할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이 용어는 낙인을 찍는 말이 아니었으며, 스미스(Smith, 금속세공인)나 테일러(Taylor, 재단사)와 같이 거의 성(姓)처럼 사용됐다.
이들에게는 특이한 법적⦁경제적 자유가 있었다. 중세의 법은 남성에게 아내를 지배하는 절대적 권력을 부여했지만, 이들 독신녀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거래할 수 있으며, 계약에 서명할 수 있고 법정에서 자신을 대표할 수 있고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여성들이었다.
18세기가 돼서야 사람들이 이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경향에는 이들을 불쌍한 등장인물로 묘사한 당시의 시인과 극작가 그리고 다른 유행선도자들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결혼안한 여성들을 어리석고, 저급하며 흉측하게 희화화했다. 그리고 제국의 정책은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을 쓸모없고 이기적이라고 취급했다.
이들 스핀스터들을 구제한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핀스터들이 가진 저항정신을 옹호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신여성들은 가정교사에서 간호사까지, 그리고 타이핑, 언론계, 학계, 법률분야까지 여성 전문가의 길을 개척했다.
또 이들은 박애주의자, 선동가, 교육자, 탐험가가 됐다. 성적 규범을 거부한 여성들도 있고, 동성애 단체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로즈네일 교수가 말했듯 성숙한 사회의 일원이 갖는 특징은 짝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영원한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상징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 관계를 갖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갖지 않을 우리 독신여성들은 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게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있었던 ‘여분의 여성들(superfluous women)’을 보자. 이들은 젊은 남성들이 사라져 결혼전망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리고 노처녀들의 국가에 대한 기여는 다시 한번 무시됐다.
(이런 역사를 볼 때) 현대의 노처녀들이 자신들의 위치에 갈등하고, 자신들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런던경제대학(LSE)의 행태과학자인 폴 돌란(Paul Dolan) 교수가 “아이가 없는 독신여성들이 결혼한 여성들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을 했을 때 그는 수많은 호응에 놀랐다고 한다.
돌란 교수는 “수많은 독신여성들로부터 고맙다는 이메일을 받았다”면서 “이제 독신녀들이 괜찮게 지낸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런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반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는 선택에는 뭔가 모욕할 만한 측면이 있다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독신여성들은 자신들의 (실제) 경험과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갖는 편견 사이에서 내적으로 갈등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제 규칙을 바꾸고 대화도 변해야 한다. 독신여성들이 증가하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독신이 우리에게 주는 인생의 경험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 정의되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노처녀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