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다반사多反辭] 인생을 되돌아보니 할 말이 많네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의 삶

 

출처 : flickr

 

무능한 남편을 몰아내고 스스로 권좌에 오른 야망의 여인,  표뜨르 대제 이후 러시아를 다시 부흥시켰던 위대한 군주, 위대한 업적  만큼이나 수많은 애정 행각으로도 유명한 여왕..이렇게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사람은  러시아의 예까쩨리나 대제(캐서린 대제)이다.

예까쩨리나 대제는 현재 폴란드의 영토가 된 포메라니아의 스테틴(Stettin) 에서 1729년 5월 2일 태어났다. 그녀는 프러시아의 귀족이었으며, 어릴 때 이름은 조피 프리데릭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젤프스트-도른부르크(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Dornburg) 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Christian August), 어머니는 요하나 엘리자베쓰(Johanna Elizabeth) 이였다. 

17세의 나이로 러시아의 표뜨르 3세와 결혼한 그녀는 1762년  알렉세이 올로프, 그리고리 올로프 형제와 합세해 궁정반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켜 죽인 후 스스로  여왕(Empress regnant)이 되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8번째 왕이었다. 그녀는 즉위식에서 로마노프 왕가의 최대의 왕관인 398.62 캐럿의 왕관을 사용했는데, 이 왕관은 현재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어 러시아를 거대한 영토대국으로 만들었다. 현재의 러시아가 가진 국토의 모양은 예까쩨리나 대제 때 형성된 것이다. 

그녀는 러시아로 시집와서 남편과 첫날밤(consummation)을 치루기도 전에 세르게이 살티코프와 성관계를 한 것으로 알려졌고, 남편인 표뜨르 3세는 엘리자베쓰 보론쵸바와 성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예까쩨리나는 세르게이 살티코프, 그리고리 올로프, 알렉산더 바실치코프, 그리고리 포쩸낀, 알렉산더 수보로프, 표뜨르 루만체프, 표도를 우샤코프, 표뜨르 자바도프스키, 주보프 왕자 등 수많은 젊은 남성을 성노리개로 이용했다. 주보프 왕자는 예까쩨리나와 애정 행각시에 그녀보다  40살이나 연하의 나이였다

알렉산더 뽀뗌킨은 나이가 들어 예까쩨리나와의  성관계에서 그녀를 만족시킬 능력이 줄어들게 되자 알렉산더 마모노프 등의 섹스를 위한 최고의 체력과 지적 능력을 갖춘 남성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녀는  남성을 성노리개로 이용한 후에 애인을 갈아치울 때에는  그들 에게 수많은 농노와 큰 재물을 하사해 후하게 대우해줬다. 
한예로 표뜨르 자바도프스키는 1777년 예까쩨리나와의 애정행각이 끝날 때 현금으로 50,000 루블, 연금으로 5,000 루블, 그리고 4,000 명의 농노를 받았다. 그녀는 러시아 동궁(겨울 궁전)에서  같이  지낸 그리고리  올로프 등 섹스파트너들의 발기된 성기를 석고모형으로 복제해 그녀의 방에  보관하기도 했다.

예까쩨리나는 러시아 남부에 있던  거대한 천연왕국 오스만 터키와 전쟁을 해 크리미아 반도와 현재의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을 뺏었고,  서부에서는 폴랜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과  전쟁을, 그리고 동부에서는 현재 미국령이 된 알래스카를 식민지화 했으며,  알류션제도에 표류한 어부를 이용해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와 접촉하기도 했다.
 
폴랜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과의 전쟁에서는 그녀의 상대방은 전애인이었던  스태니슬라프 오거스트 포니아토프스키(Stanislav August Poniatowski)였으며,  전쟁에 승리한 후에 폴랜드를 분할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녀의 재위 중에 그 악명높은  뿌가쵸프(Yemelian Ivanovich Pugachev)의 반란이 있기도 했으나 끝내는 그를 체포해 반란을 평정했다 뿌가쵸프는 사형에 처해졌는데, . 예까쩨리나는 그를 크게 고통을 줘서 괴롭힌 후에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 사형 집행인은 실수로 뿌가쵸프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일이 발생해  뿌가쵸프가  고통없이 죽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당시 문화강국이었던 프랑스의 여러 문인들, 볼테르(Voltaire),  디데로(Diderot),  달랑베르(d’Alembert) 등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굴에 에르미따쥬  박물관 (Hermitage Museum) 을 만들어 38,000권의 서적, 10,000점의 보석,   10,000 점의 서화를 수집해 보관했다.  

또한 당시 세계 제일의 개화군주였으며,  자신부터 천연두 예방접종을 시행했고, 그 후에 국민들에게도 실시해 러시아의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예까쩨리나는 1796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일설에 의하면 60세가 넘어서도 수많은 정부가 있었고,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성관계를 계속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까쩨리나 대제 동상은 당당하게 서있는 여왕 밑으로  9명의 남성들이 앉아있는 구조인데, 이들은 여왕의 애인들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일의 작은 공국의 공녀에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사람이 된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 예까쩨리나 대제의 인생을 화려하게 수놓는 것은 정치적인 능력 뿐 아니라 끝없는 애정욕이 큰 역할을 했던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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