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1년, 여성법안과 여성의 삶⑤

지난해 4월 여성 프로바둑기사 조혜연(36) 9단을 약 1년 동안 스토킹 한 40대 남성이 구속됐다. 이 남성은 조 9단이 있는 바둑교습소에 나타나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주변에 조씨가 나와 결혼했다등의 허위 사실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9단은 청와대 국민청원에 피해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조혜연 9단이 지난해 4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린 글(출처-국민청원 캡처)
조혜연 9단이 지난해 4월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린 글(출처-국민청원 캡처)

이렇게 조 9단은 스토킹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 남성이 구속된 것은 스토킹이 아니라 협박 등의 혐의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스토킹 범죄를 처벌하는 법적 조항은 경범죄처벌법 제3조에 규정된 '지속적 괴롭힘'이었다.

이 조항은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잠복하여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반복하여 하는 사람'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 형으로 처벌한다고 돼있다.

피해자가 스토킹으로 고통받고, 피해를 호소해도 가해자는 1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올해 3월에 서울 노원구에서 발생한 세 모녀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스토킹 범죄다. 피의자 김태현은 피해자들 중 큰 딸을 지난 해 온라인 게임을 통해 처음 알게 된 후 연락을 주고받다가 3차례 만나면서 호감을 갖게 됐다.

하지만 세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고, 이후 큰 딸은 김태현에게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한 후 수신을 차단했다. 그럼에도 김태현은 수차례 큰 딸과 연락을 시도했고,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살해를 결심했다.

김태현에게는 살인 혐의 외에 절도·주거침입·정보통신망법(정보통신망 침해) 위반과 함께 경범죄처벌법(지속적 괴롭힘)이 적용됐다. 큰 딸을 따라다니고 찾아가고 연락하는 등 몇 달 간 괴롭힌 김태현의 스토킹 행위는 여전히 경범죄였던 것이다.

15대 국회 때인 지난 1999년 김병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스토킹 처벌에 관한 특례법안을 발의한 후 22년 만에야 스토킹 행위는 중범죄로 처벌받게 됐다.

출처-픽사베이
출처-픽사베이

21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스토킹 처벌법 발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정부안을 포함해 10개의 법안이 발의됐고, 각 법안의 내용을 통합조정한 법률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의결됐다.

324일 국회를 통과한 스토킹 처벌법(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시행되는 오는 10월부터 스토킹 범죄자는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며, 만약 흉기 등 위험한 물건을 이용할 경우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로 형량이 가중된다.

스토킹 처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하루 전에 세 모녀가 살해돼 이 법이 빨리 시행됐더라면 김태현의 살인행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 모녀 뿐이겠는가. 스토킹 처벌법이 15대 국회에서 21대 국회까지 22년 동안 발의됐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수많은 스토킹 범죄가 발생했다. 2018년 하반기부터 20197월까지 경찰에 신고된 스토킹 범죄는 1996건이다. 하루 14.9건이 발생한 셈이다.

스토킹 처벌법 제정은 스토킹을 경범죄가 아닌 중범죄로 인정했다는 면에서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해자 처벌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피해자 보호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스토킹 범죄 전담 사법경찰관은 스토킹범죄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직권으로 또는 스토킹행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 등의 요청이 있으면 접근금지 조치를 할 수 있지만, 피해자가 법원에 직접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난 528스토킹 피해자 보호 법·제도 현황과 과제보고서에서 스토킹 피해자의 신변안전조치 도입과 피해자가 수사기관을 거치지 않고 법원에 직접 청구하는 피해자 보호명령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제언하기도 했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10개의 스토킹 처벌법안 중에 피해자 보호 내용을 담고 있는 법안은 남인순정춘숙 의원(더불어민주당) 법안 2개뿐이다.

스토킹은 지나다가 우연히 마주친 모르는 대상에 대한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특정 상대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때문에 재범의 우려가 높다. 조혜연 9단을 스토킹했던 가해자는 복역 중인 상태에서 출소 뒤 찾아가겠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조 9단에게 보냈다.

스토커를 평생 감옥에 잡아둘 수도 없기 때문에 처벌만으로는 스토킹을 근절하기는 힘들다. 피해자 보호조치가 필요한 이유다.

남인순 의원은 지난 10일 스토킹 피해자 보호조치를 강화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다시 발의했다.

피해자보호명령과 신변안전조치 등을 도입하여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고,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죄를 묻지 않는 반의사불벌죄조항을 삭제하고, 피해자가 스토킹 범죄로 인해 해고하는 등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불이익 처분의 금지를 신설하는 내용이다.

출처-SBS 드라마 ‘모범택시’ 방송화면 캡처
출처-SBS 드라마 ‘모범택시’ 방송화면 캡처

얼마 전 종영한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범죄 피해자 유족들이 택시회사를 차려서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사회악을 응징하는 내용이다. 노동착취, 학교폭력, 장기매매, 보이스피싱, 직장 갑질 등의 피해자들이 복수를 의뢰한다.

그 중 특히 리얼한 인물과 상황 묘사가 돋보였던 에피소드는 국내 최대 웹하드 업체인 유데이터 회장 박양진에 의한 갑질 및 폭행사건이었는데, 극 중 박양진 회장은 엽기적인 갑질과 폭행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을 묘사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양진호 회장은 얼마 전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확정받았다.

2019716일부터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양진호 방지법으로 불릴 정도로 양 회장의 직장내 지위를 악용한 괴롭힘의 정도는 매우 악랄하고 심각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2년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많이 줄었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은 직장인 1277명에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후 변화를 체감하는가?’를 물었다. 그 결과 체감하지 못한다는 응답이 77.8%였다.

자료-사람인
자료-사람인

심지어 응답자 중 절반 이상(50.1%)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괴롭힘 유형으로는 부당한 업무 지시’(54.6%, 복수응답)가 가장 많았고, ‘폭언 등 언어 폭력’(45.4%)이 뒤를 이었다.

특히 여성은 성희롱 및 추행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19.6%로 남성(5.2%)보다 4배 가량 많았다. 괴롭힌 상대로는 직속상사’(46%, 복수응답)가 가장 많았고, ‘부서장 등 관리자급’(43.4%), ‘CEO/임원’(26.5%), ‘동료’(20.9%), ‘타부서 직원’(7.6%), ‘협력/관계사 직원’(4.6%) 순으로 답했다. 직장과 관련된 거의 모든 남성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는데도 피해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있다.

괴롭힘의 판단 기준이 많아서 그 행위 해당 여부를 가리는 것이 까다롭고,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또 가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형사처벌 조항이 없고, 신고 접수와 조사 권한이 업주에 있기 때문에 가해자가 업주인 경우에는 법을 피해갈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지난 324일 국회를 통과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처벌 조항을 신설했다.

사용자(업주)가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거나 피해자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처벌되고, 사용자나 사용자 친인척이 가해자일 때도 과태료가 부과된다. 또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 누설 금지 의무가 포함됐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사용자와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한 노동자(정규직·계약직·임시직 등)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5인 미만의 사업장, 아파트 경비원·골프장 캐디와 같은 특수고용직, 프리랜서 노동자 등은 여전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 개정안은 오는 10월부터 시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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