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돌아오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조종석에 앉아있는 에어하트(출처-pinterest)
조종석에 앉아있는 에어하트(출처-pinterest)

1928년 대서양 횡단비행은 에어하트에게 명성을 안겨줬지만, 이는 단독비행도 아니었고, 조종석에 앉았던 것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비행기에 탑승한 것뿐이었다. 에어하트에게는 대서양 횡단비행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1932520일 마침내 또 하나의 역사가 이뤄졌다. 에어하트는 남편 퍼트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서양 단독 횡단비행을 시도하게 된다.

그는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를 출발해 15시간 18분 만에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라는 농촌 마을에 착륙했다. 고도계 고장, 엔진 파손 등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을 헤쳐가며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 4년 전 자신이 참여했던 비행기록 20시간 40분을 무려 5시간 넘게 단축했고, 찰스 린드버그와 버트 힝클러에 이은 세 번째, 그리고 여성으로서 최초의 대서양 단독 횡단이었다.

1932년 5월 여성 최초로 대서양 단독횡단비행을 마치고 북아일랜드에 착륙한 직후의 에어하트(출처-네이버 포스트)
1932년 5월 여성 최초로 대서양 단독횡단비행을 마치고 북아일랜드에 착륙한 직후의 에어하트(출처-네이버 포스트)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에어하트는 국민적 영웅이 돼있었다.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애칭도 이 때 생겼다. 에어하트의 도전과 성공은 대공황 시대에 고통받던 많은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줬다. 당시 많은 어머니들이 딸이 강인하고 당당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멜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대서양 횡단 성공 후 에어하트는 후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고, 미 의회로부터 여성 최초의 군사 훈장이 수여됐다. 또 여성 최초로 공군 수훈십자훈장 수상, 여성 최초 국립지리학회 금장 메달 수상, 교황을 비롯한 세계 지도자들의 초청을 받는 등 화려한 나날이 이어졌다.

퍼트넘은 출판업자로서 아내의 빛나는 성과물들을 멋지게 포장해냈다. 1928년 대서양 횡단비행 이후 썼던 ‘20시간 40에 이어 에어하트의 두 번째 저서인 ‘The fun of it’또한 퍼트넘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 책은 에어하트다운 특별한 유년과 학창시절, 첫 번째 대서양 횡단과 대서양 단독 비행 등 비행사로서의 당당한 여정의 기록물이다.

조지 퍼트넘이 펴낸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자서전 ‘THE FUN OF IT’(출처-아마존)
조지 퍼트넘이 펴낸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자서전 ‘THE FUN OF IT’(출처-아마존)

에어하트는 이후 1935년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단독 비행한 최초의 비행사가 됐다.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바로 세계일주 비행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출발해 46600km를 비행하는 멀고 위험한 코스였다. 항법사 프레드 누난((Fred J.Noonan)이 동승했다. 항법사는 항공기의 위치, 항로 측정, 조종실의 계기와 항공기 정비 상태 점검, 연료 확인 등 안전한 비행을 위해 필수적인 일을 한다.

1937520일 퍼트넘은 비행기 록히드 엘렉트라(Lockheed Electra)에 오르는 에어하트에게 무사히 돌아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에어하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마이애미를 출발한 에어하트의 비행기는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 아시아까지는 무사히 비행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호주와 하와이 섬 사이에 있는 하우랜드섬에서 연료를 보충해야 했는데, 출발한지 44일째인 72일 오전 하우랜드 섬 상공에 있다. 연료가 떨어져간다. 라디오 교신을 들을 수가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교신이 끊겼고, 비행기는 사라졌다.

에어하트의 마지막 비행 항로(출처-아멜리아 에어하트 박물관 홈페이지)
에어하트의 마지막 비행 항로(출처-아멜리아 에어하트 박물관 홈페이지)

에어하트의 실종 소식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에어하트의 비행은 단순히 한 개인의 목표를 넘어 미국의 꿈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9대의 해군 군함과 66대의 비행기를 동원해 보름 동안 남태평양 일대를 샅샅이 뒤지며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쳤다. 이는 해군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항공 및 해상 수색이었다. 하지만 시신이나 비행기 파편, 유류품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구조대는 718일 추락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해산했다. 그리고 1939년 캘리포니아 법정은 에어하트의 법적인 사망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32년 5월의 에어하트와 퍼트넘 부부(출처-pinterest)
1932년 5월의 에어하트와 퍼트넘 부부(출처-pinterest)

하지만 퍼트넘은 에어하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종 당시 그녀의 구조 신호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변장한 그녀를 미국 공항에서 목격했다는 제보도 잇따랐다. 퍼트넘은 큰 돈을 들여 홀로 수색을 시도했다.

그는 에어하트의 편지와 글들을 모아 마지막 비행(Last Flight, 1937)’을 출판한 후 비로소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1939년에는 날아오르는 날개: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전기라는 제목으로 에어하트의 전기를 출판했다. 그해 15일 퍼트넘은 마침내 에어하트의 사망신고를 했다.

퍼트넘은 훗날 사진, 사적인 편지, 그리고 비행 재킷을 포함한 에어하트의 소지품 일부를 그녀가 직업 상담사로 일했던 퍼듀 대학에 기증했고, 나머지 개인 소지품들은 뉴욕의 여성 기록 보관소로 보냈다.

지금까지도 에어하트의 실종은 마국 최대의 미스터리중 하나로 세인의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만큼 에어하트가 미국인에게 준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에어하트가 태어난 캔자스주에서 매년 7월에 열리는 에어하트 축제(출처-네이버 블로그)
에어하트가 태어난 캔자스주에서 매년 7월에 열리는 에어하트 축제(출처-네이버 블로그)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 에어하트가 이룬 많은 업적들은 불굴의 의지와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꿈을 이해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데 헌신했던 한 남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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